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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16년 5월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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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15 베트남 평화기행문(5) 빈안의 한, 고자이마을... 그리고 런아저씨
글쓴이 김성희(전북겨레하나 사무총장)    [2016년5월호]    조회 : 1,330



평안이라는 뜻을 가진 마을 이름. 그 평안을 깨뜨린 자들은 누구인가

1. 한 시간 만에 380명이 학살당한 마을

낌따이 마을은 시작에 불과했다.
점심을 먹고 찾아간 빈안 고자이 마을에선 더 큰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다.
빈안(Binh An, 平安)은 원래 ‘평안’이라는 뜻이다. 1966년 1월 23일부터 2월 26일(양력)까지 맹호부대 3개 중대는 빈안의 15개 지점에서 모두 1,004명의 주민을 학살했다.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728명. 어린이가 166명, 여성이 231명, 60세 이상의 노인은 88명이었다. 빈안은 더 이상 ‘평안’하지 못했다. 학살의 폐허 위에 마을을 재건한 이들은 이곳을 ‘서쪽의 영광’이란 뜻의 떠이빈(Tay Vinh, 西榮)으로 고쳐 불렀다.
빈안 학살 중 가장 처참했던 곳은 고자이 마을이다. 1966년 2월 26일, 380명의 주민들이 몰살당했다. 고작 한 시간 만에, 한국군은 여성을 윤간하고 사살했다. 아이를 산채로 불에 던지기도 했다.
고자이 마을 위령비를 둘러싸고 있는 타일 벽화에는 전대미문의 학살 장면이 형상화되었다. 옷이 벗겨진 채 불에 던져진 소녀, 절규하는 아이들과 여성들, 무서울 얼굴로 마을로 진격하는 한국군들...
위령비 바로 옆은 고자이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한 곳이다. 380명이 함께 잠들어 있는 곳에 증오비가 서 있다. 무덤 위에 세워진 증오비! 그곳에는 미국의 ‘용병’ 한국군이 학살의 주범으로 적혔다.
희생자들의 이름도 일일이 새겨 놓았다. 그들 중 “VO”로 시작하는 이름들이 있었다.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식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갓난아기들이다. 우리로 말하면 ‘개똥이’로 불리었을... . 이 죄를 어찌할 것인가?
다시 향을 피우고 국화꽃을 바쳤다. 비현실적으로 푸르른 하늘이 이토록 슬퍼 보이기는 처음이었다. 우리 일행이 간절히 기도를 하거나 먼 하늘을 바라보거나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아저씨 한 분이 오셨다. 지난 4월 한국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 런 아저씨.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.



위령비


무서운 맹호부대.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여 그려진 맹호부대 마크가 실제 모습과 좀 다르다. 그 핑계로 한국 군인 측에선 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단다.


2. 밤마다 들판을 달리는 런아저씨


고자이마을 증오비. 그 아래에 380명의 원혼이 잠들어 있다.


수류탄 파편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런아저씨. 마음이 너무 아팠다. 우리나라 한방파스가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준다는데..

당시 15살이었던 ‘응우옌 떤 런’은 빈안사(빈안면)의 깐븜이라는 마을에 살았다. 1966년 2월 15일 새벽, 멀리서 포격소리가 들려왔다. 그는 어머니, 여동생과 함께 방공호로 피신을 했다. 얼마 안 있어 마을을 들쑤시던 총소리는 점심때가 넘어서 잦아들었다. 잠시 안도했지만 오후 4시쯤 다시 총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.
결국 런 아저씨 가족은 한국군에게 붙들려 마을의 논으로 끌려갔다. 이미 다른 이웃들도 엎드려 있었다. 25가구 정도 되었다 한다. 그 후 한 시간쯤 되었을까? 한국군 중 누군가가 높고 짧게 무어라고 외치자 일제히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.
“난 내 눈으로 보았어요.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어요. 팔과 다리가 날아가고 배가 터져 창자가 튀어나오고 뇌수가 쏟아져 나왔어요.”
그는 너무 무서워 엎드렸는데 수류탄이 곁에서 터졌다.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.
눈을 떠보니 큰아버지 댁 마당에 누워 있었다. 어머니는 하반신이 날아간 채 신음하고 있었고 여동생은 뇌수가 흘러나와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. 자정 무렵 여동생이 조용해졌다. 마을 사람들이 여동생을 거적에 말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. 그들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마저 숨을 거두었다.
홀로 남겨진 런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모진 세월을 살아 나갔다. 그의 몸에는 잊을 수 없는 그날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. 여기저기 박혀 있는 수류탄 파편들. 훗날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‘베트남평화의료연대’의 도움으로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아직도 일부는 그의 혈관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. 밤이 되면 더 커지는 통증으로 잠을 잘 수가 없다. 그는 밤마다 들판을 달린다. 달려서 달려서 녹초가 되면 한두 시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기에...
런 아저씨는 말했다. “제가 말한 이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.”
그는 지난 한국 방문 때 많은 치유를 받았다. 정부는 인정하거나 배상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한국 친구들이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. 경북대학교에서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던 일은 무척 감동적이었다고 한다. (아마도 명진 스님 이야기인 것 같다.) 이제 악몽도 덜 꾸고 증언을 할 때 예전보다 덜 아프다고 했다.
손을 잡고 포옹하며 인사를 나눈 후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. 부디 이제 평안하시길... 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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